사진미학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 브레송 찰나의
거장전
시대의 눈이 사라졌다. 95세를 일기로 20세기의 대표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2004년 8월 3일 운명했다. 당시 르몽드,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즈뿐만 아니라 국내 주요 일간지들은 결정적 순간의 전설적인 사진작가의 죽음을 일제히 알렸다.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추모 성명에서 “시대의 진정한 증인인 그는 정열적으로 20세기를 찍으면서, 자신의 범 우주적인 불멸의 시각으로 우리로 하여금 인간과 문명의
변화를 영원히 기억하게 만들었다.” 고 경의를 표했다. 「찰나의 거장」전은 서거1주년을 맞이하여 매그넘에서 작품이 들어오는 대규모
전시회다.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세계적인 사진에이전시, 매그넘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한 카르티에-브레송은 근대사진의 최고봉이자 현대사진의 문을 연
영상사진의 아버지다. 뉴스News 중심의 사건에서 해방되어 피처Feature 중심의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채택된 영상의 일상성은 삶에 대한
개혁보다 인식을 더욱 강조했다. 그는 영상의 사유화와 개인적, 주관적 시각의 다큐멘터리 사진의 출현에 길을 연 선구자이다.
특히 카르티에-브레송은 35mm 카메라의 절대 경지를 이룩한 사진술의 정복자로 사진의 지배적인 유형을 도출해 냄으로써 사진 형식에
있어서 감흥을 주었다. 그가 완성한 포즈를 취하지 않는, 비연출의 캔디드 사진 미학은 느끼는 바에 대한 정직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움이다. 그는
촬영할 때에 결코 현실을 조작하지 않았다. 게다가 표준렌즈를 즐겨 사용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찍었기 때문에 피사체들의 상대적인 크기나 원근감이
정상적으로 나왔다. 더욱 카메라 앵글에 관해서는 구성의 기하학적인 각도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각도라는 관점에서 극단적인 앵글을 거부하였다. 또한
실제의 빛이 없는 경우에서조차도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광만을 존중하였다. 한편 확대 인화 시 트리밍을 했을 때에 시각의 성실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본 전시는 카르티에-브레송의 방대한 사진서고에서 엄선된 226점의 작품이 다섯 개의 카테고리로 전시된다. 결정적 순간,
영원한 존재, 내면의 공감, 20세기의 증거, 인간애가 바로 그것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재발견은 물론 결정적 순간에 관하여 더욱 심오하게
사색할 수 있는 문화의 장이 될 것이다.
결정적 순간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평판은 지금까지 발행된 사진집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1952)을 출판함과 동시에 굳어졌다. 그 사진집이 발행되면서 그의 사진은 캔디드candid 사진의 성전으로 사진의 고전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을 좋아하여 사진을 찍고 나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천진스레 계속 걸었다고 한다. 소위
카르티에-브레송 식 방법은 사진가가 아주 신속하게 촬영해서 대상은 자신이 촬영되었는지조차 전혀 깨닫지 못하는 촬영과 접근법으로
스트리트사진Street Picture의 대표적인 스타일이다. 그에게 있어 한 장의 사진이란 한 순간의 동결일 뿐만 아니라 잘 짜여진
구성의 한 순간에 대한 포착이었다. 사진은 어떤 사실의 의미와 그 사실을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가리키는 형태의 엄격한 구성이 한 순간에 동시에
인지된다는 것이다. 그는 현실의 세계가 생생한 빛을 띠고, 명암과 형태가 있는 장소에 꼭 자리 잡는 순간을 쉽게 포착하여 제시하였으며 그의 사진
형식은 시공간의 통합, 즉 완전한 조화와 균형 속에서의 찰나였다.
영원한 존재
20세기 중요 인물들을 사진예술의 거장의 눈으로 구성한 영원한 존재의 순간이다. 사람들은 초상화라는 수단에 의지하여 자신을 영원히
남기려는 욕구를 지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가장 멋진 모습을 후손에게 남겼다. 그러나 사진술의 발명 이후, 회화는 더 이상 초상화분야를
발전시키지 않았다. 사진이 회화의 형식들 중에서 이 분야의 몫을 떠맡은 것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촬영대상을 그 개인의 평상적인 상황 속에
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서 그 인물을 담아내었다. 카르티에-브레송의 포트레이트는 미술계
인물인 마르셀 뒤샹, 앙리 마티스, 쟈코메티, 샤갈, 파블로 피카소 등과 문학 및 사상계 인물인 쟝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사뮈엘 베케트,
존 버그, 수잔 손탁 등의 세계와 교감하게 한다.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 체 게바라, 마릴린 먼로, 퀴리부인, 윈저공, 달라이라마 등 세계 주요
인사들을 만나게 해 준다. 그는 언제나 찍고자하는 인물과 함께 생활하면서 첫인상을 실제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 특이한 얼굴에서 받은
첫인상을 대개 옳은 것으로 믿었다.
내면적 공감
미술계로부터 사진계로 옮겨온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초현실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카르티에-브레송은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가볍게 어루만진다든가 현존하기 위해 자아를 잊는다든가 피사체가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초현실주의가 스며든
사진이란 우연에 의하여 자신이 가는대로 내버려 두는 촬영 행위로 자동 기술을 말한다. 그것은 모호한 주의력이 날카로운 명증성이 되는 특이한 상태
또는 피사체 핵심과의 일치이다. 여기서 우연은 단순한 만남이나 출현이 아니라 존재론적 관점에서 자신과의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직관이나 무의식
등의 지속된 잠재적 감정들을 의미한다. 이렇듯 그의 사진은 내면세계와 외부세계 사이에 공감각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과 끊임없는 상호과정의
결과로 느낌의 순간을 포착했다. 이때 대상은 인물일 수도, 풍경일 수도 있다. 사진은 그 대상과 브레송이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찰나의 세계이다.
20세기의 증거
1947년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침 세이무어, 조지 로저는 사진가 회원 전원에게 이익을 분배하는 협동조합
형태의 에이전시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편집장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신이 촬영한 필름에 대한 사용권과 그들 자신의 어사인먼트를 선택할 자유를
보장받고 자신의 개성을 사진에 반영하기 위해 매그넘을 창립하였다. 매그넘 창립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출판물이나 출판사의 편집자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진가로서의 주체성과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 4명의 창립자들의 염원이기도 했다.
매그넘의 첫 번째 작업은 세계를 분할하여 촬영하는 것이었다. 데이비드 세이무어가 유럽을, 조지 로저가 아프리카를, 로버트 카파가
소련을 촬영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잡지들이 그의 사진들을 잘라내지 못하도록 보증하겠다는 카파의 약속을 받은 뒤에서야 인도의 분열상을 취재하기
위해 봄베이로 향했다. 1947년 여름 봄베이의 정치적, 종교적 적대감은 참혹한 폭력투쟁으로 변해 있었다. 최소한 천만 명의 힌두교인, 무슬림,
시크교도들이 집을 버리고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새로 생긴 국경을 가로질러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도망하고 있었다. 최소한 백만 명 이상의
인도인들이 살육되었고, 수십만 명이 대탈출 기간 동안 난민이 되었다. 그 기간 동안 카르티에-브레송은 여러 잡지에 500여 장의 사진과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1948년 인도 독립 운동의 지도자 간디의 죽음을 촬영했다.
한편 그는 중국에서 국민당 몰락 전 6개월과 공산당 집권 후 6개월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독립시기 동안 체류하였다. 특히 마오쩌둥이
집권하기 직전 청조 마지막 황실 안의 환관을 촬영하였는데, 이 작품은 마치 황실의 최후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그는 스탈린 죽음 이후,
공식적으로 소련에 입국한 최초의 서방 사진가이기도 했다. 1961년 베를린장벽 설치 이듬해에 베를린 장벽에 매달려서 무심코 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촬영하는 등 20세기의 중요한 증거들을 남겼다.
인간애
풍부한 독서량 그리고 1930년대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에 관해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자연스럽게 급진 좌파 지식인으로 성장해
갔다. 더욱 제2차 세계대전기간 중에 포로 생활과 탈출 그리고 포로와 탈주자들을 돕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더욱 강한 인간애를 체험할 수
있었다. 그는 “인간애의 뜨거운 관심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한다.” 고 역설하였다. 바로 그의 사진 철학이다. 사각 틀 밖으로 머리를 내민
멕시코의 창녀, 인도의 가난한 민중의 깡마른 아기, 휴가를 즐기는 평범한 사람 등 그의 작품 구석구석은 인간애로 가득히 스며 있다.
카르티에-브레송 사후 사진가, 리차드 아베돈은 “그는 사진의 톨스토이였다. 심오한 인본주의와 함께 그는 20세기의 증인이었다.” 라고 경의를
표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소년시절에 브로니형 암상자 카메라로 휴일이면 스냅사진을 찍곤 하였다. 얼마 후, 으젠느 앗제의 사진에
감명을 받고서 호두나무로 만든 3×4inch의 카메라를 구입했다. 그러나 렌즈 캡으로 노출을 조절하는 카메라였기에 정물의 세계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스물 두살에 떠난 아프리카 여행에서 크로스사의 소형 카메라를 만나게 되었고 시간인식이 가능해졌다. 그 후, 귀로에
마르세이유에 들려 우연히 라이카 카메라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에게 가장 적합한 카메라가 되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소형 카메라는 내
눈의 연장이다. 그때부터 내 곁을 떠난 일이 없다. 나는 삶을 포착하겠다고, 즉 살아가는 행위 속에서의 삶을 간직하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숨
막히는 듯한 느낌을 맛보며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는 채비를 갖추고 온종일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무엇보다도 나는 단 하나의 이미지로 장면에서
솟아오르는 근본적인 것을 포착하려는 욕구를 가졌다.” 고 밝혔다. 소형 카메라를 사용함으로써 거리에서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찍기 시작했다.
소위 거리사진의 미학적 관점과 전통은 로버트 프랭크, 윌리엄 클라인, 게리 위노그랜드, 리 프리드랜드, 알렉스 웹 등으로 이어진다.
카르티에-브레송은 눈의 연장으로 인식한 소형카메라의 메커니즘을 최대한 활용하여 눈으로 인식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사진적으로
포착해 나갔다. 그는 “나는 회화와 결별하면서부터 내 나름의 참다운 사진을 찍게 되었다.” 고 술회했다. 이것은 바로 회화 구도와 사진 구도의
다른 점에 대한 자각이었다.
글 : 이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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