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사실성 샤르댕의 식사 전 기도
‘식사 시간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느라 밥 먹는 것이 많이 느립니다. 주의를 주고 지도 하고 있지만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어린이집에서 받아 온 아이의 관찰기록지에는 산만한 식사 태도가 지적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적 전에 나 또한 나름대로 아이에게 식사 예절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식사 중에는 돌아다니지 마라’ ‘꼭꼭 씹어 먹어라’ ‘골고루 먹어라’ ‘식사에
집중해라’와 같은 잔소리로 즐거워야 할 식사 시간을 불편하게 만들어 버리고는 했다. 이런 방법 말고 아이의 식사 태도를 고칠 획기적인 방법은
없을까. 다른 가정의 식탁 풍경이 궁금해진 것은 이런 방법에 대해 골몰하던 끝자락 쯤이었다. 우리 아이 또래의 아이가 있는 집의 식탁 풍경
말이다.
이제 막 식사가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하얀 식탁보에서 시작된 정갈함은 선반에 놓인 가재도구를 가로질러 아이들의 옷차림으로 이어진다.
정갈함 위로 식사 준비도 마무리 되어 간다. 오늘의 특별 요리는 무엇일까. 식탁을 휘 둘러보지만, 이렇다 할 특별 요리는 없다. 다만 그
식탁에는 먹음직스런 음식 대신 맛깔스러운 정성이 가득하다. 무거워 보이지 않는 식기를 양손으로 조심스레 잡은 엄마의 손끝에서 묻어나는
정성스러움이다. 조용히 식탁을 차리는 엄마의 모습에서 주목할 것은 고요한 시선이다. 저 평화로워 아름답기까지 한 시선은 어디를 향한 것일까.
분명 무언가 애정을 듬뿍 담고 있는 것을 향해서 일 것이다. 그렇다. 그 고즈넉한 시선 끝에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자리하고 있다. 식탁 의자가
아닌 특별히 맞춤한 듯한 의자에 앉은 아이다.
식사가 준비되는 것도 모르고 놀이에 푸욱 빠져 있었나 보다. 아이의 의자와 그 주변에는 아이가 조금 전까지 가지고 놀았을 법한
장난감도 함께다. ‘밥 먹자’라는 엄마의 부름에 비로소 아이는 식사 시간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후다닥 오른손 엄지를 왼손 엄지 위에 얹어
손으로 십자가도 만들었을 것이다. 오동통해 사랑스러운 두 손이다. 작은 두 손을 모은 아이의 반짝이는 시선은 엄마의 고요한 응시와 대기에서
마주한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지금 이 차분한 식탁을 앞에 두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식탁 중앙의 또 다른 아이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낮은 의자에 앉은 아이에 비해 한결 야무져
보이는 이 꼬마 숙녀는 아이의 언니인 모양이다. 고개를 약간 숙인 언니의 두 손도 하나인 채이다. 두 손이 꽃봉오리처럼 둥근 식탁 위로 살짝
고개를 내민다. 아마 식사에 앞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려는 참인가 보다. 기도를 올리기 위해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아직 눈을 감지는 않았다.
엄마와 동생 사이에 벌어질 일이 궁금한 탓이다. 동생의 행동을 예의 주시 중인 언니는 동생이 식사 전 기도를 얼마나 잘 올리려는지 확인할
요량인가 보다. 편안하게 상황을 구경하는 언니에 비해 동생의 사정은 그리 여의치 않아 보인다. 발마저 앙증맞은 동생은 마치 “엄마, 이렇게 하면
돼요?” 라고 묻는 듯 엄마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조심스레 식탁을 차리는 엄마는 이런 아이의 질문에 바로 답할 생각은 없는 듯 차분히 응시할 뿐이다. 아이에게 생각할 시간, 충분한
기회를 주려는 엄마의 사려 깊은 배려일 것이다.
오늘 이렇게 우리를 식사에 초대한 사람은 프랑스의 화가 샤르댕(Jean Simeon Chardin, 1699~1779)이다. 우리는
그 덕분에 18세기 프랑스 파리 중산층의 일반적인 식탁 풍경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샤르댕이 동시대 화가였던 와토(Jean Watteau, 1684~1721), 부셰(Fran?is Boucher, 1703~1770),
프라고나르(Jean-Honor?Fragonard, 1732~1866)와 같이 당시 유럽 화단의 주류를 형성했던 로코코 미술에 전념했다면 우리는
정갈한 식탁 대신 화려한 드레스로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다행이다. 같은 시대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예술가가 공존했다는 사실은. 정물화에
탁월함을 드러냈던 샤르댕이 프랑스 부르주아의 삶을 주제로 한 풍속화에 전념하게 된 것은 1730년대였다.
〈식사 전 기도〉는 그의 대표적 풍속화로 같은 해에 제작되었던 또 다른 작품 〈부지런한 엄마〉의 구성을 따른 것이다. 〈식사 전
기도〉와 함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부지런한 엄마〉는 샤르댕에게 매우 의미 있는 그림이었다. 샤르댕은 루이 15세를 비롯한 귀족들의
후원을 받은 화가였다. 처음 그를 루이 15세에게 소개한 사람은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필리베르 오리(Philibert Orry
1689~1747)였고, 왕과 화가가 처음 만나던 날 가져갔던 그림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샤르댕이 〈식사 전 기도〉를 유화로 완성하기 전에 제작한 스케치는 완성작과 구성이 다르다. 〈식사 전 기도〉의 스케치는 엄마와
아이가 마주하고 있는 〈부지런한 엄마〉와 매우 흡사한 구성이다. 앉아 있는 엄마와 작은 아이가 주축을 이루는 스케치에서는 언니의 위치 또한
동생의 뒤편이었다. 그가 이러한 구성을 바꾼 것은 그림이 완성되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그가 구성을 바꾼 것은 〈식사 전 기도〉가 〈부지런한
엄마〉와는 또 다른 명작으로 남길 바랬던 그의 소망 때문이었다. 이렇게 각각의 작품은 서로 다른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샤르댕 작업의 기본
공식에 모두 충실한 것이기도 했다.
‘위대한 마법’, 어느 비평가의 표현대로 이 두 작품은 샤르댕 예술 특유의 표정을 만든다. 식탁보의 청결함이 만져질 듯 하고,
식기의 부딪힘이 들릴 듯 하고, 음식의 온기가 전해질 듯한 신비로운 사실성이다. 이 모든 경이로움은 부드러운 색과 온화한 빛에서 비롯된 것이다.
샤르댕의 예술은 밝음과 어둠만으로 긴 여운의 꼬리를 만든다는 점에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스텐(Jan Steen 1626~1679)의
그것과 닮아 있다. 두터운 붓질과 가느다란 빛이면 충분했고, 과묵한 어둠과 순결한 밝음이면 족했다. 그의 예술이 너무 많은 기교, 너무 많은
재주를 필요로 하지 않은 까닭은 말이다. 인간적이고, 친밀하며, 정직한 아름다움을 별 다를 바 없는 일상의 풍경에서 건져 올린 그의 예술은
재료의 맛을 존중할 줄 하는 요리사의 미덕을 떠올리게 한다.
얼마 전 구립 어린이집에서 가톨릭 재단 유치원으로 옮긴 아이는 식사 태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입학 전 예비 모임에서 원장
수녀님은 참석한 부모들에게 여러 가지 당부를 하셨고 특히 ‘젓가락 사용법’을 비롯한 식사 예절을 생활화하도록 집에서 지도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규율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유치원이라 식사 태도가 좋지 않은 아이들에게 특별한 제재가 있기라도 한 것인지 아이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단다.
대신 아이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착하신 예수님 좋은 부모님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을 축복해 주세요,
아멘. 선생님 먼저 드세요. 친구들아 맛있게 먹자. 잘 먹겠습니다’라고 식사 전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비록 짧은 기도이지만 아이는 기도를
올리며 운동 전에 준비운동을 하듯 식사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허락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랬다. 샤르댕의 〈식사 전 기도〉에서 내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엄마의 태도였던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소리치거나, 윽박지르지 않을 것 같은 엄마의 태도 말이다. 아마도 아이에 대한
저런 신뢰의 태도가 교육적으로 설득력을 갖는 것은 아닐까.
이제 비로소 아이는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오늘 내가 먹고 있는 것이 단순한 탄수화물과 단백질이 아니라 신의 은총과 축복임을
말이다. 오늘 아침은 아이에게 바른 식사 예절에 대한 잔소리를 대신하여 함께 식사 전 기도를 올리려고 한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글 : 공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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