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poem

가까이서 우리를 지켜보는 신의 모습을

keyword77 2005. 8. 7. 12:08

 
 
 

도시의 月出
1817 ,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作

 



어떤 점 때문에 이 그림은 낭만주의로 간주되는 것일까.
현대에 와서 흔히 낭만적이라는 것이 매우 로맨틱한 사랑의 감성에 치우쳐 사용되지만 사실상 예술에서 낭만주의 의미는 폭넓은 다양한 의미를 포함한다.

 


미술에서 낭만주의요소를 간추리기는 간다하지 않으며 지역별 작가별 그 특성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문학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낭만주의는 독일을 중심으로 영국 프랑스로 퍼져 꽃을 피우게 되는데 풍경화 중심에 감정이 풍부히 드러난다는 큰 테두리의 공통점은 있지만 의식이 자유를 부르짖는 만큼 그림은 좀더 자유롭고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된다.

 


당시 시대가 혁명을 거듭하고 산업화되어가면서 도시화되고 물질적으로 변화해 가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자연을 그리워했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소리 높였다.
독일 낭만주의 대표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도 풍경화들을 그렸다. 하지만 그는 단지 보이는 풍경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에서 종교성을 발견하였다. 풍경 속에서, 바로 자연에서 신의 존재를 느꼈고 자신의 내부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그림 속에 신앙심을 담아냈는데 그래서 그의 풍경화는 사실적으로 그려졌지만 의도적으로 조합해서 만든 풍경이며 상징적인 풍경화이기도 하다.



대부분 그의 그림들 속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육지와 하늘의 이분법적 확연한 구분이며 항상 앞쪽의 육지는 어둡고 하늘은 밝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을 비추는 것은 해가 아닌 달이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그는 빛이 신의 힘이라고 생각했으며 육지가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이라면 하늘은 영원한 구원의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육지는 거칠고 어둡게 그려 삶의 고충을 표현했으며 하늘은 빛으로 밝게 표현하여 신의 영광이 가득한 희망찬 미래로 표현했다.

 


이 그림도 예외는 아니다. 근경의 육지는 어둡고, 하늘은 어둠이 걷히듯 빛이 가득하다. 물론 언듯보면 석양의 노을이 가득한 해질 녁 같지만 이 작품의 제목은 해가 아닌 달임을 분명이 암시하고 있으며 의미부여를 위해 과장하여 이처럼 달빛을 지나치게 아름답고 밝게 표현하였다.

 

 

그가 달을 선호한 이유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태양과 같은 절대적인 신보다는 그 존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달이 신의 존재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 예수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양 빛은 너무 눈부셔서 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세상을 가득 채우는 빛을 가득 만끽하면서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는 반면 달빛은 그에 비해 미미하지만 어둠에서 바라볼 수 있고 그 빛덕에 세상을 그나마 인식할 수 있음에서 신을 느끼게 하는, 신앙심을 불러주는 존재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전의 종교화가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처럼 시각적으로 신을 탄생시키고 그 줄거리를 재현해냈다면 프리드리히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을 그리려 하지 않고 우리주변에서 발견되는 신의 존재와 신앙심을 발견하고 담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사물들에서 상징성을 발견하고 의미부여를 하여 풍경화 속에 끼워 넣곤 했는데.
이 그림에서 보이는 앞쪽의 그물로 구속, 죽음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건축양식 중에서 중세 고딕 양식을 선호했는데 바로 뾰족한 첨탑양식으로 신을 향한 신앙심을 구현했듯이 하늘을 치솟는 신앙심이 반영된 고딕 건축 양식으로 조금 더 하늘과 가까워 질 수 있어 희망을 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속의 달 양옆으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건축물은 대칭을 이루고 있다. 그는 종종 이처럼 화면 중심에 달빛을 두고 대칭구도로 구성함으로 완전함을 의미한다.
결국 그의 그림은 단지 풍경화라기 보다 하나의 종교화인 셈이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구석구석을 훑고도 결정적으로 놓치지 말아야 진풍경은 달을 중심으로 걷히는 하늘과 빛을 반사하는 수면이다. 보라 . 화면 중심에 커다란 눈동자형상이 보이지 않는가. 그는 의도적으로 눈동자처럼 풍경을 만들었다.

 

 

더구나 빛을 가득 담아서. 그는 우리 가까이 현실에서 신이 지켜보고 있다고 믿었으며 자연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다. 비록 눈으로 신을 확인하지는 못하지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위대한 힘을 느끼지 않는가. 이미 세상은 위대한 창조물 아닌가. 자연을 보노라면 더 이상 창조할 것이 무엇인가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의 그림을 감상하고 바라보는 현실의 풍경은 경이롭다. 발견하며 깨달은 그림은 이미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 그림처럼 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면 탁한 공기 때문에 바라보기 지쳐하지 않을까. 환경오염으로 혼탁해지는 세상을 바라보며 아예 눈감아버리지나 않을까 .세상 밖을 마주하기가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