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주변에는 사랑의 노예들이 많다. 특히 ‘똑똑하다’고 불리는 여자들이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이성을 잃고 때론 멍청한 사랑에, 때론 나쁜 사랑에 거침없이 빠져든다.
직장에서는 무슨 일이든 똑 부러지게 하는 은행원 미미(28) 씨. 그녀에게는 1년 반가량 만나온 남자 친구가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남자 친구는 미미 씨에게 금전적인 문제를 호소하며 지속적으로 돈을 빌려가고 있다. 처음에는 몇 백만 원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빌려간 금액은 그녀가 몇 년간 살뜰히 모아놓은 적금 총액만큼이나 늘어났다. 불안해진 미미 씨는 둘 간의 채무 정리를 요구했지만 그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그렇게 못 믿겠으면 헤어지자”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다. 미미 씨는 그가 나쁜 남자임을 감지하면서도 그놈의 정이 무엇인지 돌아서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친구들이 그만 헤어지라고 재촉할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원래 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야. 안 그래도 요즘 힘들 텐데 나까지 손을 놓으면 그 사람은 어떡하니?”
친구들 사이에서는 ‘퀸카’로 손꼽히는 나나(29) 씨. 외국계 회사의 대리인 그녀는 성격도 야무지고 외모도 훌륭해서 따라다니는 남자만 여럿이다. 하지만 나나 씨는 자신에게 관심을 표하거나 구애하는 남자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여자에게 목매는 남자는 시시하고 별 볼일 없어 보여 눈길이 가지 않는단다. 반면 지금껏 그녀가 만나온 남자들을 보면 하나같이 문제가 많은 ‘나쁜 녀석’들이다. 몰래 양다리를 걸치거나, 여자 친구를 5분 대기조 다루듯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고, 만나면 섹스부터 요구하고, 끊임없이 뭔가를 시킨다. 나나 씨는 그런 남자 친구를 만나는 걸 힘겨워하면서도 은근히 즐기는 눈치다. 오늘도 그녀는 예고 없이 데이트를 요청하는 남자의 전화에 군소리 없이 퇴근을 서두른다. 나쁜 남자에겐 뭔가 특별한 매력이 숨어 있다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딱 잘라 말하면, 미미 씨나 나나 씨나 나쁜 놈에게 꼬여 고생하고 있는 ‘헛똑똑이’들이다. 본인들만 그 나쁜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뿐, 주변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며 그 사랑이 어서 막을 내리기를 바라고 있다.
나쁜 남자만 꼬이는 여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녀들은 모든 ‘넘치는’ 여자들이라는 것이다. 자신감도 넘치고 자기애도 넘치고 교만도 넘친다. 어려서부터 주변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장한 탓에 자신은 남들보다 특별하다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젖어 있다. 자신을 짝사랑하는 남자들은 시시해 보이고 손쉽게 잡히지 않는 어려운(나쁜) 남자들이 욕망의 대상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원하는 것, 갖고 싶은 것은 꼭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들은 잘 잡히지 않는 나쁜 남자들을 ‘내 남자’로 만들 때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뒤늦게 상대방이 나쁜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자신은 너무나 특별한 사람인지라 나쁜 남자도 착한 남자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은 부족한 점이 많은 남자지만 내가 조금만 더 희생하고 노력하면 곧 변할 거야.”
“지금은 내가 더 좋아하지만 곧 그가 날 더 좋아하게 될 거야. 난 그렇게 할 수 있어.”
심리학적으로 보면 자신 안에 ‘과대한 자아’가 존재하는 여성들의 경우 상대방의 모든 것을 감싸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평강공주가 바보온달을 위인으로 만들었듯, 지금은 저 모양 저 꼴이지만 자신이 곧 변화시킬 거라고 착각하는 셈이다. 심지어 남자가 폭력적인 언행을 하더라도 이를 정당화할 이유를 만들어 자신을 방어한다.
똑똑한 그녀들이 직장에서 써먹던 생존법, 즉 어떤 상황에서든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에든 덤벼들고, 목표한 바를 위해서라면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던 방식을 그대로 상대 남성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 같은 증상을 일종의 집착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헌납함으로써 상대방을 옴짝달싹못하게 옭아매는 일종의 집착 증세인 것이다.
이쯤 되면 둘의 관계에서 이미 여자의 존재는 없다. 남자를 위한 여자만 있을 뿐이다. 영리한 나쁜 남자들은 이 찰나를 놓치지 않는다. 단물만 쏙 빼먹고 잽싸게 도망갈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그 여자의 진심을 담보로 과감한 배팅을 할 수도 있다. 결국 싫증이 난 남자는 다른 여자에게로 이동하거나 무례하게 이별을 선포한다.
“어쩜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모든 걸 다 준 죄밖에 없단 말이야.”
나쁜 남자와의 연애사는 대부분 이런 결말을 맺는다.
제아무리 잘난 여자라 한들 남자가 한 번 우습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난 게임이다. 남자들은 동물적 본능이 발달된 존재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 여자가 자신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려 할수록 남자는 여자를 약자 취급한다. 남자 안에 내재된 폭력성과 난폭함이 강해져 여자를 함부로 대하고 필요한 것만을 착취하려 드는 것이다. 처음엔 도도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여자로 느낄지 모르지만 자신을 위해 간, 쓸개를 모두 내줄 수 있다는 걸 아는 순간 남자는 돌변한다.
당신의 남자가 이미 이 과정에 진입했다면 둘의 관계를 반드시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제 그 관계는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아쉽지만 사랑의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혹시 반복적으로 비슷한 유형의 나쁜 남자들을 만나왔다면 당신 안에는 그 나쁜 남자만큼이나 삐뚤어진 콤플렉스가 자리 잡고 있을지 모른다. 나쁜 남자를 탓하면서도 그 나쁜 남자의 못된 기질에 빠져들고, 위로를 느끼고, 만족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왜곡된 자아가 숨어 있는 건 아닌지 진단해봐야 한다.
하루빨리 ‘나쁜 남자’에게 물든 나쁜 기질을 빨리 털어내고, ‘좋은 남자’가 꼬이게 하는 기운으로 갈아입자. 지금껏 충분히 목석을 가려내는 훈련을 했으니, 당신은 이제 좋은 남자와 제대로 사랑하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