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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박근희 기자]
‘개띠 해’ 병술년 새해를 맞아 애견 경기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군요. 물론 천만 원을 호가하는 지체 높은 ‘귀족견’이야 경기와 상관없으시겠지만 말입니다. 부익부 빈익빈, 그거 인간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 따라 우리 개들의 팔자도 극과 극으로 달라진답니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고요? 글쎄요….
◆개 팔자가 상팔자 맞구먼
멍멍. 내 이름은 ‘줄리앙’이야. 태어난 지 16개월 된 수컷푸들이지. 나의 조상은 루이 16세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푸들경이야. 한국에 70만 마리(한국애견협회 추정치)나 되는 ‘족보 견’이 있었지만 우리 가문만큼 오래된 가문은 없을 걸? 몸값은 천만 원이 넘지. 입는 것, 먹는 것 등등 해서 매달 웬만한 월급쟁이 한 달 봉급이 고스란히 들어가지.
아이 졸려. 어젠 나랑 절친했던 ‘세바스찬’ 형님이 고혈압으로 세상을 뜨는 바람에 우리 주인과 함께 조문을 다녀왔어. 늦은 밤인데도 귀족애견 동호회원들이 와 있더라고. 낮엔 화장시키기 위해 장래업체에서 시신을 수습해갔대. 형님네 주인은 형님 납골을 항아리에 담아 장롱 안에 고이 모셔 놓는다고 하더군. 형님이 보고 싶을 때는 그것이라도 꺼내 볼 거라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셨어. 좀 웃기다고? 우리들 사이에선 익숙한 풍경인데.
우리 주인은 큰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노부부야. 주인 아들은 사업이 얼마나 바쁜지 결혼 후 얼굴도 잘 안 내밀어. 막내딸마저 유학 가면서 집안이 많이 썰렁해졌지. 덕분에 내가 이곳으로 와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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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앙 유치원 갈 시간이야. 아유, 예쁜 것. 너처럼 명품이 잘 어울리는 개는 처음 봤어. 개는 역시 주인을 닮는다니까.” 오늘은 40만원 짜리 ‘버버리’ 울 니트와 ‘에르메스’ 목 끈이 내 패션 컨셉이야. 품위유지를 위한 것이니 너무 삐딱하게 보지 말라고. 참, 외출 전에는 반드시 ‘애견 미아 방지기’를 목에 달아야 해. 주인과 일정거리 이상 떨어지면 경고음이 울리기 때문에 나를 노리는 개 도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거지.
사실 난 유치원 가는 것을 썩 좋아하진 않아. 딱히 하는 것도 없어서 심심하기도 하고. 매달 25만원이라는 비용이 부담된다고 옆집 몰티즈는 한 달 다니다 말던데 우리 주인님은 골프 치러 가 있는 동안 나를 혼자 집에 놔둘 수 없다며 매일 유치원에 보내지. 주인이 맞벌이 부부인 친구들도 유치원에서 가끔 만나곤 하지.
오늘 오후엔 건강 검진 결과가 나와서 청담동 병원에도 가봐야 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동물용 MRI를 갖추는 등 훌륭한 시설로 이름난 곳이야. 1주일 전에 치과·안과·MRI 등 검사를 했는데 별 문제는 없는 것 같아. 내 건강비결? 웰빙 식단도 중요하지만 얼마 전부터는 보신을 위해 한약도 먹고 있어. 개가 무슨 보신이냐고? 이거 왜 이래. 분당엔 내 단골 한의원도 있어. 그곳에 가면 한의사가 맥을 짚어 체질에 맞게 보약을 지어주지. 나는 기를 보호해주기 위한 십전대보탕을 먹는데 다른 애들은 천식·비염·피부병 치료를 위해 한약을 먹기도 하더라고. 참고로 우리 개들은 사람보다 체온이 2℃나 높기 때문에 인삼은 피해야한데. 한약 먹는 건 참 곤욕이야. 그래도 열흘치에 4만~5만원이라는 거금을 아깝지 않게 생각하는 주인의 마음을 생각하면 쓰다고 마다할 수가 없지.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꾸준한 운동이야. 요즘은 주로 실내에서 전용 러닝머신을 이용해. 주인이 날 위해 작년에 69만원 주고 샀다니까. 사실 한국이라는 나라는 개들이 참 살기 힘든 나라야. 혼자 밖에 나갈라치면 곳곳에 ‘보신탕집’ 간판 보이지, 공원에서는 산책도 못 하게 하지. 나야 주인 자가용 타고 움직이시는 몸이니 괜찮지만 내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니 택시 승차 거부는 기본이라고 하더군. 난 눈치 보며 공원 산책하기 싫어서 주말이면 용인에 있는 애견테마파크에 가. 그곳에 가면 프리스비 같은 실외 스포츠를 즐길 수 있어. 개전용 수영장도 있는데 겨울에는 이용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쉬워. 최고 연회비가 400만원 가까이 되는 멤버십 클럽이라 아무나 출입할 수 없다는 게 무엇보다 좋아. 한 마디로 물이 좋다 이거지. 주인들은 우리랑 놀아주다가도 서로 자기 애견이 더 잘났다며 설전을 벌이기도 해. 그래서 그곳에 가는 날은 유독 명품으로 빼입고 품위 유지에 신경을 써야 한다니까.
아, 지금까지 한 얘기만으로는 내가 만날 놀고먹기만 하는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 나는 몸값 아주 높은 프리랜서라고. 나와 같은 혈통의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처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어. 나야 좋지 뭐. 연애도 하고, 우리 주인 주머니도 두둑하게 해드리고. 내가 한번 성은(聖恩)을 베풀면 우리 주인은 내 몸값의 10% 정도를 받는데. 어어~ 이봐, 기자양반 사진은 찍지 마. 나에게도 초상권이 있거든. 웰웰(well well)~
◆ 파란만장犬의 한풀이 들어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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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를 ‘초복이’라고 부르지. 여름만 되면 인상 안 좋은 아저씨들이 된장 어쩌고 하면서 자꾸 내 이름을 들먹거리는 게, 살짝 기분 나쁘지만, 우리 동네에 일곱 놈이나 있는 ‘똘이’나 네 마리나 있는 ‘메리’, ‘해피’, ‘워리’ 보다는 그래도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내 이름이 낫지. 혈통 좋은 개들은 작명소에서 돈 주고 짓기도 한대. 솔직히 우리들이야 이름이 무슨 소용 있겠어, 어차피 출석 부를 일도 없는데 말야.
다들 내 팔자가 상팔자라고 하는데 그건 옛날이야기지. 난 엄마 젖을 떼자마자 다섯 형제와 함께 좁은 박스에 담겨 시장으로 나왔어.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그 작은 박스 안이 우리 형제들과 보낸 마지막 밤이었지. 하나라도 더 먹겠다고 버둥대던 기억…. 배고팠지만 난 그때가 좋았어.
난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 마음씨 좋게 생긴 아저씨에게 팔려갔어. 내가 간 집은 작은 아파트였는데 앞니 빠진 두 여자 아이가 반겨주었지. 그 아이들은 베란다에 내 방까지 마련해주었어. 하지만 오래 가진 못했어. 목구멍이 간질간질 해서 좀 짖었더니 아파트 주민들의 항의로 더 이상 그 집에선 살 수 없게 되었지. 그리고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어. 간 곳 마다 똥오줌을 못 가린다, 털이 많이 빠진다, 너무 커서 징그럽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다들 나를 거부했지.
어쨌든 나는 어느 순간부터 길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어. 내가 길을 잃은 건지, 버려진 건지 확실히 알 수는 없어. 가끔 길거리를 헤매다가 잃어버린 개 찾는 전단지를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고. 그런데 나처럼 잡종이나 똥개 찾는다는 전단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출신부터 다르니 뭐. 하루는 어떤 커플이 버려진 나를 발견해 애견센터에 데려다 줬는데 아예 받아주지도 않더라고. 1만원의 요금을 내야 하루 정도 머물 수 있다는 거야. 결국 내가 온 곳은 여기, 민간단체에서 운영하는 ‘○○보호소’야. 일종의 고아원이지. 현재 같이 살고 있는 가족은 20마리. 어떤 친구는 전 주인이 키 안 크게 하는 주사를 놔서 무척 왜소해. 그 친구는 여기서도 기를 못 펴. 아파트에 살았던 친구는 주인이 못 짖도록 성대 수술을 시키는 바람에 소리도 못 내. 또 어떤 애는 ‘짖음 방지 전기 충격 목걸이’를 너무 오랫동안 달고 있어서 지금은 짖는 법을 아주 잊었다고 하더군. 걔들은 여기서도 대화에 못 끼어 왕따야. 그래도 이 정도면 우리는 선택 받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두들 만족하고 있어.
어느덧 전국에 우리 견구(犬口)만 비공식적으로 350만이래. 그 정도면 거의 부산인구와 맞먹는다고.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 방치되고 있는 것 같아. 누가 그러는데 2004년 동안 전국에 나처럼 버려진 개들이 3만7000여 마리였대. 그 중에 주인이 찾아가거나 입양되는 비율은 20% 안팎이라고 하더라고. 나머지 80%는 그냥 조용히 안락사 시킨다는 거야. 서울만 놓고 보면 더 심각해. 2005년 11월 현재 서울시에 신고 된 유기견 수는 1만3822마리인데 주인이 찾아간 애들은 563마리, 입양된 애들은 478마리래. 나머지 애들은 여전히 보호소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가 보호소에 들어온 지 한 두 달 만에 저 세상으로 가게 되지. 매년 전국적으로 우리 같은 유기 동물 처리하는 데만 27억 원을 쓴다더라고. 생각해봐, 얼마나 끔찍해. 하긴 그래도 그렇게 편히 보내주려는 사람들은 오히려 고맙지. 우리를 오직 먹잇감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어떤 줄 알아? ‘개는 패야 맛있다’는 말이 어디서부터 돌았는지. 왜, 가끔 사람 물거나 하는 대형사고 치는 애들 있잖아. 그중 70~80%가 보신탕집 탈주범 출신이라는 건 알고 있나? 걔네들도 처음부터 포악하진 않았을 텐데. 우리처럼 인간에게 충성을 다 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동물이 어디 있다고.
최근 애완동물 등록제를 실시하자는 동물보호법 어쩌구 하는데 뭔가 하루빨리 개선되었으면 좋겠어. 에이,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부디 이 한 목숨 올 여름 참사나 무사히 넘길 수 있기를 빌어야지. 올해는 대접 좀 해주려나. 월월~
(여성조선 박근희기자 [ yaya.chosun.com], 강범석 인턴기자[연세대 사회과학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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