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내력--
2014. 5. 19. 21:14ㆍ* 요리(스크랩) *
[박찬일 셰프의 푸드오디세이]한식세계화 주역 '떡볶이'..귀한 몸 떡볶이 길거리 음식 되기까지
매경이코노미 입력 2014.05.19 09:09↑ 1970년대부터 인기를 끌던 떡볶이는 몇몇 브랜드가 전국 체인망을 갖출 정도로 여전히 대중음식으로 활황세다.
민간연구소에 떡볶이를 연구하라고 거액의 지원금을 주네 마네 하는 실랑이가 있었고, 멀쩡한 한식 놔두고 왜 하필 떡볶이냐는 비판도 많았다. 그 주장의 핵심을 보면 떡볶이는 '끈적거리고 이에 달라붙는(sticky) 성질이 있어서 서양인들이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외국인은 오직 서양인만 있느냐, 일본인이 한국에 와서 가장 좋아하는 게 떡볶이다. 백인만 외국인의 중심으로 보는 사대주의'라는 반론이 제기됐다.
다른 논란도 있었다. 문화상품으로 수출하자면서 학교 앞 불량식품 추방 목록에는 늘 첫 번째로 떡볶이가 올라갔다. 이런 해프닝 속에서 이번 정권도 한식세계화를 지속할 것을 천명하면서 떡볶이가 다시 등장했다. 대통령이 직접 언급까지 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생명력이다.
궁궐에서 남아도는 떡으로 정월에나 만들어 먹던 별식이 어떻게 대중화의 최선두에 서고, 끝내는 국가 홍보사업의 상징이 됐을까. 이런 상황에 지난 정권 아래서 떡볶이가 유사 이래 두 번째로 활황세를 타기 시작했다.
첫 번째 활황세는 물론 1970~1980년대다. 학교 앞 문방구나 간이음식점에서 매운 밀가루 떡볶이를 팔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당시 이 간식을 이길 품목이 없을 정도였다. 그 시절에 학교를 다닌 40~50대들은 한 접시 20, 30원씩 하던 매운 고추장 떡볶이를 잊지 못할 것이다. 최근의 취재에 의하면 전주 지역에서는 유명제과점에서도 팔았다. 전주 태극당의 인기 메뉴였다는 여러 증언을 확인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떡볶이 역사에서 두 번째 활황세가 찾아온 것은 경제 불황 때문이었다. 스트레스는 쌓이지만 돈은 없는 대중들이 매운 것을 찾았다. 그 인기를 선도한 것은 프랜차이즈였다. 아딸, 국대떡볶이, 죠스떡볶이 같은 떡볶이 브랜드가 크게 인기를 끌고 전국적 체인망을 갖추게 됐다. '조폭떡볶이'라는 희대의 상호가 홍대 앞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사건도 있었다. 원래 포장마차에서 영업하던 이 가게는 이제 어엿한 가게를 얻어 합법적으로 영업할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압구정과 명동에 떡볶이 프랜차이즈점이 생기는 엄청난 변화도 연출했다. 온갖 먹거리가 새로 나오고 시장을 주도하지만, 여전히 우리 간식은 떡볶이와 순대, 어묵꼬치가 선두를 달린다. 세대가 바뀌어도 유혹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음식들이기 때문이다. 값도 싸서 누구나 쉽게 사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도움이 됐다.
이런 매운 떡볶이는 언제부터 먹게 된 걸까.
얼마 전 케리 미 국무장관이 통인시장에서 기름 떡볶이를 사 먹는 현장이 공개돼 그 떡볶이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기름 떡볶이는 대세인 매운 떡볶이의 원조 격으로 불린다. 간장과 기름을 넣어 '볶은' 음식이다. 여기서 볶았다는 음식의 기원을 볼 수 있다. 오늘의 떡볶이는 볶았다기보다는, 그저 버무리고 끓이고 조린 음식이다. '떡볶이'라는 이름 자체가 전통 요리법에서 볶는 과정을 의미한다. 볶았다는 건 고급 음식이었다는 뜻도 된다. 기름이 워낙 비싸고 귀한 시절에 떡을 아무나 볶아 먹을 수 없었다. 그 이면에는 떡이 남아서 볶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살림이 넉넉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요리법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우리 궁중요리계의 원조인 황혜성 선생이 쓴 '한국의 요리(韓國의 料理)'는 모두 4권으로 돼 있는데 '궁중요리(宮中料理)'가 별도의 권으로 묶여 있다. 놀랍게도 떡볶이는 이 권에 들어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궁중떡볶이란 말도 안 나온다. 그냥 떡볶이다. 재료도 화려하다. 흰쌀 떡에 표고, 쇠고기, 참기름이 들어간다. 요즘 같은 떡볶이에 비해 원가만 열 배 이상 나갈 고급 음식이다. 황 선생은 이미 그 시절 유행하던 희한한 매운 떡볶이 문화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는 특별히 레시피 옆에 이런 글을 달아 놓았다.
"떡볶이는 고추장을 넣어 맵게 하는 게 아니고 각색 채소를 떡과 함께 곁들여 먹는 음식이다." 떡볶이는 '승정원일기'에도 등장하는 유서 깊은 음식이다. 떡볶이를 병적(餠炙)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이 음식을 좋아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무수리 출신으로 숙종의 은총을 받아 영조를 낳은 궁녀이니 모 방송국 드라마에 나왔던 동이가 그 주인공이다."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윤덕노 지음) 1950년대 이후 밀가루 원조를 받아 밀가루 떡볶이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 음식은 여전히 고급일 수밖에 없었다. 1936년 1월 11일자 동아일보에는 떡볶이 요리법이 나온다. 황혜성 선생의 궁중요리와 레시피가 거의 같다. 1974년 1월 17일 같은 신문에는 정월의 요리로 떡볶이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전히 쇠고기와 버섯을 쓰는 고급품이다. 그러니까 매운 밀가루 떡볶이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에도 여전히 '음식다운 떡볶이'는 쇠고기와 참기름 같은 고급 재료를 쓰는 것이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궁에서 먹던 요리가 반가로 퍼져 나가고 이것이 나중에 해방 이후 매운 음식 열풍이 불면서 대중화됐다고 보면 맞다. 위키백과는 이렇게 현재의 떡볶이를 소개한다.
'한국전쟁 직후에 개발된 음식이다. 1953년 마복림(1921~2011년)이 광희문 밖 개천을 복개한 서울 신당동 공터에서 길거리식당 음식으로 팔던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마 할머니는 바로 고추장 광고에 나오면서 이름을 알린 그 할머니다. '며느리도 안 가르쳐주는 비법' 말이다. 마 할머니가 발명했는지 아니면 이미 전국적인 유행을 타면서 자연스레 퍼져 나갔는지 모르겠지만 여러 조건이 현대의 떡볶이를 탄생시켰다.
먼저 미국의 밀가루 공급이다. 미국은 자본주의 세력의 교두보가 된 한국에 아낌없이 원조 물자를 풀었다. 한국전쟁은 귀하던 밀가루가 흔해진 시기였다. 조선시대만 해도 밀가루는 양반들과 부자들의 별식에나 쓰였다. 한반도가 밀가루 재배에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개량된 밀가루는 엄청난 기세로 한반도로 밀려들어왔다. 수제비, 소면이 서민음식이 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저가 밀가루의 등장은 떡은 쌀이라는 등식을 허물었다. 떡볶이에는 당연히 쌀떡이 들어가야 하는 오랜 요리법을 무너뜨린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1970년대에 시장에서 파는 밀가루 떡은 엄청나게 쌌다. 그걸 사다가 집에서 떡볶이를 해먹으면 거의 공짜에 가까운 값이었다. 시장 안에 그런 떡을 뽑는 공장이 두엇 이상 있을 정도였다.
고추장의 보급도 한몫했다. 밀가루 떡은 냄새가 나고 찰기가 떨어져 궁중식으로 간장과 고기에 볶으면 맛이 떨어진다. 오히려 싸구려 공장 고추장에 버무려야 제맛이다. 간장, 고추장, 된장을 사 먹는 풍조가 시작된 1960년대 이후 집집마다 비닐봉지에 든 달콤한 고추장을 먹었다. 값도 쌌고 단맛이 입에 맞았다.
저렴한 밀가루로 담그는 공장 고추장은 시장을 장악해 나갔고, 거리의 떡볶이에 에너지를 공급했다. 우리의 추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매운 떡볶이는 이렇게 국제정치사의 한 축에서 비어져 나온 음식이었다. 얄타회담에 의한 남북분단, 그리고 한국전쟁, 미국의 원조로 이어지는 이 땅의 정치적 흐름이 낳은 음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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