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사메 무초 라틴 아메리카의 사랑의 찬가
우리는 남녀간의 사랑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사랑은 계층이나 인종, 국경의 장벽을 비웃는 것이지만, 연인에게 자신의
정열을 선언하고 표시하기 위한 기호체계는 집단이나 사회마다, 또는 공동체마다 다른 것 같다. 어떤 곳에서는 그것이 완곡하고 은유적이라면, 다른
곳에서는 상식적인 범위를 벗어나기도 한다.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남자들은 구애할 때 “우리가 아끼는 암소의 젖을 영원토록 함께 짜봐요.” 라고 말한다. 짐바브웨에서는 “당신은
옥수수를 자라게 하는 햇빛과 같아요.” 라고 말하고, 냉소적이고 무뚝뚝한 기지 아래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경향이 있는 호주 남자들의 표현은
투박하기 짝이 없다. “당신은 죽여주는군.” 이다. 환경과 문화의 차이가 만들어낸 심리학이리라.
그러나 사랑에는 언제나 예의범절이 존재하고 그것이 연인들을 연가戀歌와 같은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법이다. 남자는 여자를 달콤한 말로
유혹하지 못하면 시와 노래로 인도하고, 세계의 많은 시와 노래들은 그 같은 사랑과 유혹의 역사를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 어느 민족이나 민족의
집단적인 기억 속에는 사랑을 표시하기 위한 시와 노래의 보고寶庫가 들어 있다.
아주 격렬하게 온몸을 던져 고통이나 외로움을 몰아내고 자신의 불행을 잊는 성적유희가 노예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자유였기 때문일까.
라틴 아메리카나 카리브인들이 물려받은 성적 유산에는 다분히 격정적이고 이교도적인 측면이 있다. 그들의 사랑에는 조금도 죄책감이 없으며 거의
방종에 가깝다.
실제로 멕시코 시티나 아바나, 라우 데 자네이루 등 라틴 아메리카 도시들의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들어가 보면, 남녀 손님들은
반드시라고 할 만큼 나란히 앉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남녀가 테이블에 서로 마주보고 앉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 이유를 물어 본다면 아마
그들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할 것이다.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 서로 피부접촉을 할 수 없지 않아요?” 라고. 쾌락을 누릴 권리를
세속화함으로써 유교적, 기독교적 견해와 완전히 결별한 라틴 아메리카의 연인들은 그 명성에 걸맞게 어디에서나 나란히 앉아서 뜨겁게 키스하거나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마치 꿈결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의 러브 송을 들어 보면, 촉각적觸覺的인 노래가 유난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뜨겁게
키스해주오’라는 뜻을 가진 만인애창의 키스 찬가 베사메 무초Besame mucho는 말할 것도 없고, 쿠바의 작곡가 오스발도
파레스(Osvaldo Farres, 1902~1962)가 쓴 볼레로의 명곡 아세르까떼 마스Acercate mas는 ‘더 가까이’라는 뜻이다. 더
있다. 밀 베소스(Mil besos, 천 번의 키스), 프레네시(Frenesi, 광란), 끼에레메 무초(Quiereme mucho, 더욱더
사랑해주오), 당신에게 키스할 때Cuando te beso, 당신의 품 안에서 아침을 맞이했어요Amaneci en tus brazos 등 모두
하나같이 본능에 충실한 에로틱한 문화에 속해 있는 곡들이다. 그러나 결코 외설스럽거나 추잡하고, 음울한 노래가 아니라 재치와 해학, 서정성이
풍부하고 라틴 아메리카의 역동적이고 신비로운 예술처럼 즐거움이 넘친다. 덧없으며 시름 많은 이 세상에서 사랑의 자유주의는 모든 것이 불안정한
현실의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닐까.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천황 히로히토가 전례 없이 잡음 섞인 녹음 방송을 통해 떨리는 목소리로 “짐은 국민 여러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과 운명의 명령에 따라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내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냄으로써 다가오는 모든 세대에게 위대한 평화를 위한 길을 열어주기로 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순간, 우리
민족은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목이 터지게 만세를 외쳤다. ‘해방’은 우선 ‘기쁨’이었다. 그때까지 애수와 한恨이 스며든 패배주의적인 단조
가락 일색이었던 우리 가요도 해방과 함께 갑자기 밝아지기 시작했다. 해방은 또 수많은 사람이 고국을 찾아 되돌아오는 ‘귀향’이기도 했다.
바로 이 시기 우리 가요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해방과 함께 미군이 진주하면서 C레이션과 추잉 껌, 코카콜라 그리고 재즈라는
이름의 미제 대중음악이 덤처럼 직수입돼 새로운 풍물을 이뤘다. 이런 시대배경 위에 팝송을 직접 부르거나 번안해서 부르는 가수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사람이 현인(玄仁, 1919~2001)이라는 예명으로 알려진 현동주玄東柱였다. 경남 구포 태생으로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 3학년 때 일본에 건너가 우에노 음악학교엘 다녔으나 강제징용이 두려워 상해로 도망, 호구지책으로 상해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다 해방 이듬해 서둘러 귀국했던 사람이었다. 인천항에 도착, 화물열차를 타고 서울에 온 그는 살길이 막막해 악극단에서 노래를 부르다 29세가
되던 1948년 현인이라는 이름으로 ‘신라의 달밤’을 취입해 일약 스타가 되었다. 현인은 레코드 출반을 정식 데뷔로 따지는 가요계의 관례에
따르면 해방된 가요계에서 신곡을 취입, 데뷔한 ‘대한민국 가수 제1호’라는 얘기도 있다.
유난히 큰 코 때문에 ‘코끼리’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던 현인은 라모나Ramona, 유아 마이 선샤인You are my
sunshine, 베사메 무초Besame mucho를 우리말로 번안해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기도 했는데, 이 중에서도 베사메 무초는
우리나라에서 히트한 첫 라틴 음악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우리 말 가사였다.
베사메 무초 베사메 무초 고요한 그날 밤 리라 꽃 지던 밤에 베사메 무초 베사메 무초 리라 꽃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베사메 무초야 리라 꽃같이 귀여운 아가씨 베사메 무초야 그대는 외로운 산타 마리아 ...
베사메 무초가 여자 이름으로 둔갑한 것이다. 스페인어는커녕 영어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던 시절이라 베사메 무초가
영어로 Kiss me much라는 뜻인 줄 알 턱이 없었던 것. 사실 베사메 무초를 사람 이름으로 오해 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949년 주한미국 초대 대사로 부임한 이가 존 조셉 무초John Joseph Mucho였으니까.
누군가는 불후의 탱고 명곡 라 쿰파르시타La Cumparsita를 두고 “지구의 자전과 함께 하루 24시간, 1분도 쉬지 않고 전
세계에서 연주가 계속되는 곡” 이라고 말했지만 베사메 무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키스해주오 뜨겁게 키스해주오 마치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당신을 잃을 것 같아 두렵다오 내 곁에
있어주오 당신의 눈동자에 내 모습 새겨주오 기억해주오 내일이면 나는 당신과 헤어져 멀리 떨어져 있을
테니까 키스해주오 뜨겁게 키스해주오
원래 라틴인은 솔직하고 격정적인 성性자유주의자들이지만, 볼레로풍風의 이 멕시코 노래는 그 명성에 걸맞게 연애 행위의 시적
황홀감이 넘쳐흐른다. 한 쌍의 남녀가 매혹적인 사랑의 정원에서 뜨겁고 완전한 사랑의 황홀함을 느낀다. 이 에로틱한 노래는 1941년에
발표되어 라틴 아메리카에서 문자 그대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곧이어 1944년 미국에서 토미 도시악단이 <KISS me
much>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음반이 히트하면서 지명도는 엄청나게 높아졌다. 2차대전으로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 파병된 젊은 미군 병사들은
베사메 무초를 들으면서 현실과 가슴의 욕망 사이에서 두고 온 연인을 꿈꾸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1953년, 저 유명한 트리오 로스 판초스의 감미로운 보컬이 나오면서 인기를 모으기 시작, 지금까지 반 세기가
넘도록 불멸의 명곡으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 트리오 로스 판초스에서 로스 파라과요스, 로스 뜨레스 디아만떼스, 페레스 프라도, 만토바니, 퍼시
페이스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티스트가, 또한 오케스트라가 이 곡을 애주愛奏했는지 모른다.
베사메 무초의 생명력은 실로 끈질기다.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로라 피지, 다이애나 크롤, 셀린 디옹, 곤쌀로 루발까바, 빅토르
라즐로 그리고 카운터 테너 슬라바 심지어 중국어, 알제리어로도 불려지고 있고 지금도 클래식, 재즈, 파퓰러 등 장르를 막론하고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저마다 색다른 감성으로 이 마음 설레이는 ‘키스 찬가’를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베사메 무초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이
거리낌 없는 사랑의 노래가 겨우 21살 밖에 안 된, 그것도 처녀 피아니스트가 쓴 곡이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작곡자는 바로 꼰쑤엘로
벨라스께스(Consuelo Velazqez, 1920~2005)였다.
그러나 그 나이의 여인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우편사업에 보탬이 될 만큼 정열적으로 연애편지 쓰기에 열중하면서 ‘사랑’이라는
거대하고 텅 빈 공간에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을 몰아넣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의 감정은 경험에 의해 풍요로워진다.
빅토르 위고는 키스 행위를 “불꽃에 입을 갖다 대는 것” 이라고 말했다. 베사메 무초가 강렬하게 암시하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사람들의
상상력은 이런 저런 설을 만들어 화제를 낳기도 했다. 특히 가사 중 ‘뜨겁게 키스해 주오. 마치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besame
mucho. Como si fuera esta noche la ultima vez’ 이라는 구절을 두고는 꼰쑤엘로 벨라스께스가 여행길에서 만나
짧은 순간을 불태운 남자에 대한 마음을 애틋하게 표현한 것이라는 그럴듯한 설이 나돌아 곡을 한층 로맨틱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꼰수엘로 벨라스께스의 설명으로 이 인상적인 가사에 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이 풀렸다. 벨라스께스가 친구의 애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안을 갔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사를 썼다는 것이다. 친구의 애인은 병이 위중해서 오늘 내일 하는
상태였고 이별을 안타까워하며 서로 포옹하고 키스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두 연인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벨라스께스가 마침내 역사상 가장 강렬한 키스
찬가를 쓰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꼰수엘로 벨라스께스는 멕시코의 중서부 구스만에서 태어나 피아니스트로 음악과 인연을 맺은 뒤 피아니스트와
녹음 전문가로 활약하다 1941년 베사메 무초를 히트 시킨 뒤 음반회사의 중역과 결혼, 행복한 삶을 누렸다고 한다. 그녀는 지난 2005년 1월
22일 멕시코 시티에서 호흡기 질환으로 숨졌다. 향년 88세. 그러나 그녀가 뜨겁게 노래했던 베사메 무초의 신화는 강렬하면서도 영원한 사랑의
선물로 남아 세상의 모든 연인들을 키스라는 ‘감정의 인력’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런데 지금도 필자는 베사메 무초를 들을 때 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사실 역사적으로 1400년대 중엽에서
180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 지구의 절반은 키스라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다. 키스를 어떤 방식으로 묘사하고 찬양하든 키스의 욕망은 문화권마다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중국 사람들은 키스를 퇴폐적이라고 해서 남녀가 입 맞추는 행위를
식인종이나 하는 짓이라며 멸시했다. 지금도 여러 문화권에서는 키스를 할 줄 모른다. 에스키모인들은 키스 대신 서로 코를 비벼댄다. 또 어떤
인종들은 서로 가볍게 두드리거나 손을 쓰다듬거나 할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베사메 무초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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