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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동부 퀘존시 노밸리치 거리에 있는 허름한 치과 간판들 | 필리핀 거리를 걷다 보면 ‘덴탈 클리닉’(Dental Clinic)이라고 적힌 남루한 간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100미터에 하나꼴로 걸려있는 이 허름한 간판들과 낡은 건물 외관을 보고 있지만 ‘정말 이곳이 치과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다. 심지어 그냥 평범한 가정집에 의자만 덩그러니 갖다 놓고 영업을 하는 치과도 있다.
얼마 전 미디어다음은 필리핀 동부 퀘존시 노밸리치 거리에 있는 한 치과의원을 찾았다. 작은 상점 건물 위해 옥탑방을 고쳐 사용하고 있는 영세한 규모의 치과였다.
담당의사인 폴 박사는 한가로이 TV를 시청하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1999년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했을 당시만 해도 폴은 큰 병원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던 ‘인기’ 치과의사였다.
하지만 이곳에 개업한 이후로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대부분의 일과를 이렇게 무료하게 보내고 있다. 집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을 생각하면 스스로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치과의사는 넘쳐나고 경기는 좋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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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침체의 장기화와 과당경쟁으로 필리핀에 있는 상당수의 치과의원이 열악한 설비만을 갖춘 채 영업을 하고 있다. | 폴이 이렇게 환자가 없어 일손을 놓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필리핀에 치과의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가 개업한 퀘존 시내뿐만 아니라 인근 민다나오 거리 등에는 한 집 걸러 하나씩 치과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치과의사가 많다.
필리핀에서 다른 의사는 10년 동안 공부를 해야 하지만 치과 의사의 경우 6년 만에 면허를 딸 수 있다. 시간과 비용이 적게 드는 만큼 치과의사 지원자가 넘쳐났고 결국 임대료도 내지 못하는 치과의사가 나올 만큼 경쟁이 치열해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폴은 얼마 전부터 동료 치과의사들과 함께 간호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치과의사를 계속해서는 지금의 생활고를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폴은 “많은 치과 의사들이 정말 간호사가 되고 싶어 한다”며 “나도 요즘 가족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와 함께 간호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동료들은 이미 많은 치과의사들이 간호사로 전업했다고 이야기한다. 간호사가 되면 미국 등 선진국에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지원자가 매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간호사 시험을 준비하고는 있지만 폴과 친구들은 아직까지 돌아가면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다. 간호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지만 당장 생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운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병원에 나가지 않는 날이면 폴과 친구들은 인근 대학에 나가 관련 과정을 밟고 있다.
같은 동네 식당 2층에 자리를 잡고 있는 치과의 클레인 박사도 상황이 마찬가지다. 이곳 역시 시술대 하나에 오래된 치료도구 몇 개가 전부였다.
2003년 개업을 한 클레인은 “퀘존에만 치과가 1000개는 넘을 것”이라며 “이 중에서 시술대가 2개 이상인 곳은 20%도 안 될 만큼 모두 상황이 열악하다”고 말했다.
클레인은 “어릴 때부터 동경했던 치과의사지만 막상 되고 나서 보니까 돈벌이가 되지 않을 만큼 상황이 어렵다”며 “이미 많은 동료들이 간호사로 진료를 바꾼 상태”라고 말했다.
경기침체 장기화, 의료보험 가입률 낮아 환자 급감
생계를 위해서 간호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지만 어렵게 취득한 면허를 포기해야 하는 치과의사들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해 보였다.
폴은 “2년 전만 해도 일이 너무 많아서 예약한 손님들만 받았다”며 갑자기 찾아온 불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최근 필리핀은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치과의사뿐만 아니라 다른 전공의들도 간호사로의 전업을 준비하고 있다.
의료보험 체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불경기가 장기화되다 보니 병원을 찾는 환자 수가 급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의료보험공단인 ‘필 헬스’(PHIL HEALTH)의 집계에 따르면 현재 의료보험을 소지한 필리핀 국민은 전체 인구 8500만 명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3700만 명에 불과했다.
치과의사들은 “당장 경제상황이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간호사로 전업하는 치과의사의 숫자는 꾸준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며 “지금 상황에서는 외국에 나가 의사생활을 하기 전에는 뾰족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