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유와 사색을 위한 마음의 풍경
앗! 무엇을 그린 것일까. 잽싸게 눈을 돌려 제목을 찾을지 모른다. 하지만 잠깐! 문제집의 답안을 찾아보듯 서두르지 말자.
제목을 보기 전에 펼 수 있는상상의 날개를 접지 말자. 현대인에게 가장 부족한 여유와 사색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그림감상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자. 뭘 그린 것 같은가. 붓질이 자유롭고 온갖 색들이 칠해져 있다. 그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색은 밝은
아이보리색이다. 색들의 어울림이 그다지 조화로워 보이지 않으며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엉켜서 물과 기름이 반발하듯 밀치고 밀리는 편하지 않은
움직임이 느껴진다. 이처럼 뭐가 뭔지 잘모르겠는 추상화를 들여다보기란 쉽지 않다. 정말 당혹스럽고 오히려 자신을 방어하려는자구책으로 화가에게
비난의 화살을 꽃기도 한다.
'나∼ 원. 나도 그리겠다.' '내가 발로 그려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물론 보고 흥내는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지
화면에 이런 행위를 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미 본 다음에 흥내를 내는 것은 예술세계에서 의미가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데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릴 줄 몰라서 이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았다면 이제 제목을 보자 . '심상' . 아하! 마음을그린 것이군.
우리의 눈은 사람들을 식별하고 인식하는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가 어떤 한 사람을 대면할 때 우선 우리의 눈으로 외모를 보고
나름대로 판단을 하는 것처럼‥‥ 하지만 외모만으로는 그 사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일차적으로 끌리는 게 외모일지라도 결국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의 인품과 성격, 재능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눈으로 보이는 외형을 그대로
그린다면 보기에는 편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을 담아 내진 못한다는 것을 알았고 보이지 않지만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진리를 담겠다는
의지가 이처럼 추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림은 크게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구상적인 그림과 그렇지 않은 추상화로 나뉜다. 인간의 내면세계가 강조되고 주된 이슈가 되면서 인류가
발전해 왔지만 그 이론을 담는 철학. 예술 등은 언어화되고 시각화되면서 인간들을 당혹하게 하고 담을 쌓으며 외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그 한
예가 추상화라 할 수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시각화시킨 것에 대해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그림들은 주관적이서 그림의
의도를 읽기가 쉽지 않을 수 도 있다. 하지만 그림이란 의도대로 읽는 데 의미가 있다기보다 표현의 자유만큼이나 감상의 자유를 누리는 데 있다.
오히려 그런 그림들을 통해 사고를 제한하지 않고 사유의 계기를 마련하고사고의 폭을 넓혀 보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사람을 그릴 때 외모는 보이는 대로 형태를 잡고 색을 칠해서 그리면 되지만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는 어떻게 담을
것인가. 보이지 않는 세 상을 담아내기 위해 색과 형태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화폭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상화는 가장 사실화이기도 하다. 감성의 세계와 형이상학의 세계를 화가의 개성에 따라 가장 진실되게 담은
행위이므로.
화가의 해석이 담기는 작업이기에 너무 주관적이고 어렵다고 느낄 수 있지만 예술의 위대한 힘은 바로 그 속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고 함께 동참해서 사유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감상을 해서
무엇을 얻는다는 것은 감상을 하는 과정. 그 자체로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심상' 이라는 이 작품 속의 밝은 아이보리색은 비어 있는 공간의 의미일 수도 있고 지우는 의미일 수도 있으며 다양한 색과 무질서한
붓질로 표현한 것은 마음속에 혼재해 있는 온갖 잡념과 상념들일지도 모른다. 결국 지우고 채워야 할 마음은 여백의 느낌을 주는 아이보리 같은 마음
아닐까.
제한된 화폭속에서 색과 붓질은 싸우고 갈등하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을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것을 끄집어
내어 표현한 결과는 보기에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보기에 어렵다고 등을 돌리지 말고 조금만 마음을 열고 보이지 않는 마음을
끄집어 내어 보자. 붓을 가지고 색들로 표현하는 나의 심상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겠는가
"네, 저녁 7시에 4사람이요. 창가로 자리 해주세요."
특별한 날 특별한 식사를 위해 예약하는 이유. 결국 창가를 얻기 위함이 아닐까. 차창밖으로 어둠이 깔려 별로 볼 것도 없고 비록
빨간 브레이크 불빛의 밀리는 차들 행렬만이 눈에 들어 올지라도 우리는 창가를 원한다.
사실 우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도 언제 어느 곳을 가던 일단 창가 쪽을 훑어본다. 항상 먼저 자리가 차지되는 곳은
창가다. 비행기를 탈때는 어떤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창가를 부탁한다. "창가쪽 자리를 주세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비행기 안에서
창가라는 것이 그다지 좋은 자리는 아니다. 이착륙때를 빼놓고는 더 시끄럽고 춥고 들락거리기 불편한 구석자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창밖을 볼수 있다는 점 때문에 긴 시간동안의 불편함보다 선호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뭔가를 보고자하는 강한 욕구가 있고 특히나
대지와의 끊임없는 텔레파시를 원한다. 인공적으로 제한된 공간에서 눈을 통해서나마 가슴을 트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연을
그리워하고 동경한다. 그것은 삭막한 현대사회에 와선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인간은 제한된 공간에서 창쪽을 선호한다. 음식점, 열차,
비행기뿐아니라 자동차를 탈때도 이왕이면 탁트인 운전석옆 조수석을 선호하는 것처럼.
이런점에 착안해서 나는 종종 답답한 공간에 풍경화 걸기를 권유한다. 흔히 집안에 부담없는 무난한 그림으로 벽면을
채우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흔한 예로 일반적으로 부엌에는 과일이나 꽃이 그려져 있는 작은 그림들을 의례적으로 거는데 이왕이면 발상을 전환해서
그저 잔잔한 아름다움을 담은 것이기보다 느낌이 살아있는...욕망이 꿈틀거리는 조금 크다 싶은 풍경화를 과감히 걸 것을 권유하고 싶다. 그 그림은
답답한 벽의 창이되어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사에서 풍경이 화폭에 담긴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옮겨온 인류의 역사속에서 자연 풍경은 별로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근대 이전 풍경화는 정물화처럼 종교나 그밖의 내용을 위한 상징과 배경으로 그려졌을 뿐이었다. 르네상스에 접어 들면서 자연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고 원근법의 발견 덕에 평면의 화폭에 3차원의 풍경을 사실대로 옮길 수 있게된다. 이처럼 보는 방법이 발견되면서 본격적으로
풍경화가 발전하게 되고 풍경화가 절정에 이르는 것은 바로 인상주의에 와서이다. 사진같은 그림이 아닌 그야말로 화가의 시각과 열정, 에너지가 살아
숨쉬는 풍경화 그림에서 우리는 인간미를 느끼고 자연의 힘을 느끼는 것이다. 풍경화는 인간이 자연에 관심을 가지면서 생겨났고 자연속에서 신과
인간을 발견해가며 매력을 발휘했다.
<별이 총총한 하늘의 사이프러스 나무> 라는 고흐의 작품을 보자.
우리는 이그림을 보며 한눈에 풍경화임을 안다. 물론 무엇을 그린것이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안에서 모이는 풍경자체보다
그속에서 감도는 기운에 매혹된다. 기운이 감도는 하늘과 대지. 한폭의 풍경속에 왜소하기만한 인물. 색과 붓질이 살아 있는 그흐의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속에 숨어있는 감성과 데이트하게된다. 메마른 일상속에서 삶의 원동력이란 바로 이런 계기를 통해서가 아닐까. 흐르는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결국 자연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발견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비례하여 우리는 자연과 멀어져갔고 그리움을
더해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처럼 창가를 원하고 창문의 크기를 확장하고 자연을 찾아 나선다. 어떤가. 자연이 보이고 인간이 느껴지는
한폭의 풍경화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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