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통한 자유의 성취
슬픔, 성숙의 자양분
가끔씩 ‘가장 기쁠 때가 언제였나’ 같은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쉬워 보이는 질문이지만 의외로 대답을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다. 기쁜 일이랍시고 생각나는 게 고작 상급학교에 합격했던 것, 졸업했던 것, 상 받았던 것
나부랭이다. 끄집어 내놓고 보니 창피하다. 내 기쁨의 근원은 고작 다른 사람과 삶의 속도를 같이 하는 것이나,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에 있었다.
확실히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것은 기쁨보다는 슬픔임에 틀림없다. 기쁨의 기본속성은 만족이고, 모든 만족은 원래 자기중심적이다.
하지만 슬픔은 ‘되돌아보게’ 만든다. 되돌아봄의 성찰은 아프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지평은 넓어질 수 없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라는 개인적인 원망이 ‘사람에겐 왜 이런 고통이 있는 걸까’의 깊은 물음으로 이어질 때 인간은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 때 비로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인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보이고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 보인다. 정말이지 슬픔은 인간을
성숙시키는 자양분이다.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 자리 잡게 하는 힘이 슬픔에 있다. 이 슬픔을 온전히 담아낸 예술, 그것이 비극이다.
고통의 응시, 비극
비극悲劇은 삶의 어긋남을 다루는 예술이다. 나의 소망, 의미, 정의와 어긋난非 현실을 바라보는 마음心은 그 자체로 슬프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나는 할 수 없는 것,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진 않는 것, 생의
환희를 만끽할 때 소멸의 시기를 인식해야 하는 것. 이러한 현실은 목숨을 가진 인생에겐 너무 가혹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삶의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은 백치와 죽은 자 뿐이다. 이러한 고통과 슬픔을 그대로 응시하는 것, 이것이 비극을 형성하는 기본정신이다. 따라서
비극은 용감하고 숭고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비극을 이루는 영웅들이 있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주로 신화의 인물들이다. 신화의 인물들은 불가능한 것을 뚫고 나가는 저돌적인 용기와 지혜를 갖추고 있다. 그들은
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신의 권위에 순종하지만 굴복하지는 않는 자존감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이 비극적 영웅이 되는 것은 이러한 탁월함에 있지
않다. 닥치는 대로 깨부수거나 무지막지한 힘을 과시하는 인간들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천박한 현대의 정신과는 정반대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헤라클레스(이름의 뜻도 ‘영웅’이다)의 이야기가 비극의 소재가 되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화
속의 인물들을 비극적 영웅으로 만드는 것일까? 그들은 어떠한 고통에 직면해야 했던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고통을 통해 그들이 발견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묶여서 자유로운 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티탄족 프로메테우스다. 그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 준 죄로 제우스의 진노를 사 바위산에 묶여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았다. 다른 많은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은 제우스에 대한 오만함을 가진 티탄족으로 형상화된다. 그러나
아이스킬러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의 프로메테우스는 신에 대한 오만함으로 자신의 운명을 포박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인간을
사랑하는 대가’로 고통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고통을 통해 고통받는 또 다른 존재와 만난다. 자신과 똑같이 올림푸스의 신에게
보복당한 이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것은 고통 속의 프로메테우스뿐이다.
그의 당당함은 끝까지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만약 제우스가 어떤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해서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제우스의 지위를 빼앗고 신들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르메스가 찾아와 그 여자의 이름을 밝히라고
위협하는데도 그는 끝내 입을 다문다. 분노한 제우스가 천둥과 폭우로 그가 묶인 바위산을 가르고 프로메테우스는 서서히 그 밑으로 가라앉는다.
묶여있는 가운데서도 결코 자존감을 잃지 않은 프로메테우스가 나중에 제우스와 대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제우스와 대결할 수 있는
존재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무자비한 힘에 대항해 몸의 자유는 잃었지만 정신의 자유는 획득한 프로메테우스 밖에는 없는 것이다.
눈을 찔러 보는 자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등장하는 오이디푸스만큼 인간에 대해 잘 아는 인간이 있었을까?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순간, 그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실에 접근해 갈수록 그는 자신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잔인한 신탁에 한
걸음씩 다가서게 되고, 이것은 인간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신했던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게 됨을 의미한다. 내가 누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자신의 파멸을 몰고 올 수 있는 자기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끝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결국 자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모든 껍질과 장식을 내려놓은 채 벌거벗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겸손하고도 강인한 자존감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테바이에서 추방된다. 그러나 이것은 오이디푸스의 패배가 아니다. 그는 눈을 통해 ‘보는’ 것을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시각의 범주에서 탈출시킨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변하지 않는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정신의 허세를 부셔버렸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한계를 경험한 정신의 크기다. 자신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에만 정신은
허세를 버릴 수 있다. 오이디푸스의 사회적인 죽음은 정신의 지평을 넓힌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역설적인 생명인 것이다.
죽어서 사는 자
오이디푸스가 추방될 때 그 길을 함께했던 그의 딸 안티고네 역시 온전한 자유인의 길을 선택한 인물이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을 마무리짓는 대단원이기도 하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이 대변하는 공동체, 도시의 법에
대항하여 가정과 개인의 법칙을 주장하며 죽음을 택한다. 이것은 고집스러운 한 여자아이의 철없는 집념이 아니었을까? 도시와 공동체의 원리를
어기면서 서로 싸우다 죽은 오라비의 시체를 땅에 묻어야 한다는 안티고네의 주장은, 반역자의 시체는 땅에 묻을 수 없다는 크레온의 명령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즉, 안테고네의 자유의지와 크레온의 법은 충돌한다.
그렇다면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자유는 요원한 문제일까?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는 인간이 한 개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가치다. 그러나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나의 정체성은 개인으로 시작하지만 공동체 안의
가치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개인의 자유는 개인이 공동체의 주인으로 설 때 가능하다. 나의 가치와 공동체의 가치가 일치할 때
나는 온전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의 가치에 함몰되고 만다.
이미 죽어버린 오라비를 위해, 그것도 공동체의 원리를 어긴 오라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안티고네의 행동은 일견 무모해
보인다. 그러나 안티고네의 싸움은 단지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의무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 자신을 위한 싸움이다. 오로지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긍지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운명과 자유, 그 역설의 성취
신화 속 인물들을 규정하는 첫 번째 조건은 운명으로 표상되는 거대한 힘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넘어설 수 없고 설득시킬 수도 없는
무조건적인 삶의 조건이 바로 운명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절대로 제우스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피할 수 없으며, 안티고네
앞에는 죽어버린 오라비와 지엄한 왕의 법이 놓여있다. 그렇지만 그리스 비극에서의 운명은 결정론적인 관점에서 파악될 수 없다. 모든 운명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발현함으로써 도달하는 최종 도착지이기 때문이다.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엇갈림 속에서 비극의 주인공들은 결단한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인간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대가로 고통의 길을 자초한다. 끔찍한 신탁이 성취되어도, 잔혹한 전쟁의 패배가 기다리고 있어도, 심지어 목숨을 잃어도,
운명이 허무한 체념이 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묶여있고, 보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철저한 절망을 통해 이들은 고통 받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며, 완전한 자유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대가를 치르는 삶은 위대한 결실을 맺는다. 그 위대한 열매는
현실 속에서의 성취를 최고의 가치로 평가하는 부박한 정신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때 운명은 자유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이 된다. 일견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두 힘의 충돌 속에서 인간들은
상처받고 깨지지만, 이러한 고통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더 큰 자유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역설을 통해 자유를 성취하는 자, 그들이 바로
비극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을 통해 고통과 슬픔은 더 큰 자유와 환희로, 절정의 기쁨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글 : 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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