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슈틸
1910년대를 전후해서 가장 주도적인 미술계의 움직임은 "추상미술"의 태동 및 전개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1900년
초 칸딘스키에 의해 예고되고 뒤이은 작품들이 더 이상 재현의 목적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연의 재현'을 벗어나려는 움직임과 아카데미즘이 가진
진부함에의 도전으로 실제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특히 후기 인상주의가 보여준 반 고흐와 고갱의 색채와 공간에서 추상성을, 세잔느가 시도한 사물의
구축적 표현과 더 확대된 입체파에 이르는 조형적 표현의 가능성은 추상의 길을 입증하고 있다.
추상미술의 경향은 본격적으로 시각화면서 크게 '서정적 추상'과 '기하학적 추상'으로 드러났다. 특히 기하학 추상 계열은 단연 피에트
몬드리안을 필두로 하는 신조형주의로 대변될 수 있다. 그는 개인적 성격에서부터 금욕적이고 절제된 심각한 면모를 가지고 있으며, 신조형주의의 기본
이념 역시 새로운 조형성의 탐구 즉, 순수한 주형세계를 지향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구체적인 형태 재현을 거부하고 보다 원초적인 보편적 관계,
"수직·수평의 비대칭적 관계"만을 고집하고 끝가지 추구했다.
************ 몬드리안
몬드리안은 초기에는 신인상주의,사실주의,자연주의,야수주의등의 여러사조가 혼재하는 재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911년 이후 2년간의
파리 체류이후 그에게 새로이 입체파를 경험하는 게계가 되었으며 당시 분석적 입체파시기의 전성기였던 그 조형세계에 크게 영향받는다.
이와 같은 그의 그림세께의 변화는 일련의 <나무>연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점차적으로 단순화과정을 거쳐 도달하는 기하학적 순수한
조형세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하겠다. 1908년 <붉은 나무>는 표현적이면서 거칠은 두터운 화면과 그 분위기는 보다 자연의 재현을
실현하고 있다. 이때 파리를 다녀온 시기의 1912년의 <회색 나무>는 점차 규칙적이거나 꼽을 수 있는 일정한 선을 연상하게 한다.
즉, 분석시기 입체파의 영향이 보이는 나무 줄기의 단수화된 표현과 붓터치의 공간과 입체적인 면은 전 단계에서 재현적 의미를 점차 상실하고
있다. 1914년의 <타원형의 콤포지션>에서는 거의 수직수평의 짧은 단선으로 기호화 같은 구성 작품이 창출된다. 비로소 신조형주의
기본적인 틀이 완성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신조형주의는 모든 선과 형태는 수직·수평의 직선과 그것이 엮어내는 직각,네모꼴로 엄격하게 제한된 표현을 한다. 색채에 있어서도
3월색으로 국한시키고 여기에 흑,백,회색의 무채색을 첨가하는 정도이다. 그리고 그 제한적인 선들을 결코 반복적인 대칭구도를 배제한 비대칭의
화면을 추구한다. 이것이 몬드리안이 추구한 순수한 추상의 세계이다. 신조형주의의 배경에는 <De Stijl>과의 관계가 커다란 한
몫을 하고 있다. 반데스부르크가 이끄는 이 잡지는 역시 절대적인 완전 추상을 이룩하고 있으며 회화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건축등에서 생활 전반의
신조형을 꿈꾼다. 이들이 함께한 완전 추상은 회화를 덧없는 지각의 우연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동시에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근분적인 실재성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1920년대 말부터 반데스부르크는 사선을 통한 변화와 긴장감을 시도하나 몬드리안은 그에 반대하여 데 스틸 그룹과 갈라서는
계기가 된다. 그는 사선은 우연성,불안감내지 긴장감을 조성하므로 그의 조형세께에 불순물로 여겼다. 그러나 데 스틸과 뜻을 같이 한 기간에
이루어진 신조형주의 추상 세께는 건축뿐아니라 회화세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다. 몬드리안은 말년에 뉴욕에 체재하면서 새로운 도시의 기운을 보며
감흥받아,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등의 그의 조형세계의 새로운 활력을 보이고, 한편 그의 집안을 온통 신조형주의식의 수직·수평의
순수하고 절제된 내부 인테리어로 끝까지 그의 세계를 관철한다. 그의 말년에 신조형주의는 쇠퇴기이나 그가 가진 확고한 예술의지는 사후에도
바우하우스에서 바로 수용되었으며 디자인계열에서 지금까지 기본이 되는 형태로서 제공되고 있다.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에 의해 1919년 설립되었으며 여러차례 옮겨지다가 결국 1933년에 나치에 의해
폐쇄되었다. 1919년 창립선언문의 서두는 '모든 작용의 행위, 최종목적은 완전한 건축이다. 한떄 시각미술에 주어진 가장 위대한 과제는 건축을
장식하는 것이다...
'살롱 미술'로 전락한 잃어버린 건축정신을 회목해야 한다. 미술은 결코 전문작업이 아니다. 미술가와 장인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와같은 창작력에 대한 복음서에 영감을 준 것은 앙리 반 데 벨데와 윌리엄 모리스였다. 전자는 예술어 있어서 종합화와 순수한 형식을 주장한
선각자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바이마르에서 활동한 작가였다. 후자는 미술과 공예운동의 이론으로 바우하우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바우하우스는 기계문명시대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열렬히 환영했을뿐 아니라 이를 구조적으로 이론적으로 미학적으로 충분히 이용했다.
바우하우스는 이론과 실습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파울 클레의 교습 스케치북, 칸딘스키의 전·선·면 등이 그런 것이었고
교육과정은 원칙적이고 계속 바뀌고 보강되는데 이론쪽으로는 형식론,재료학,과학 및 수공예? 기술적인 숙련에 치중되었는데 칸딘스키와 클레의
비이성적이고 신비적인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 조화되었다. 모흘리 나기, 요셉 알버스, 이텐, 파이닝거등의 당대의 뛰어난 교수진이었다.
바우하우스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가구,도자기,직물등의 건축과 공업 및 실내디자인 분야였다. 새로운 기술과 재료를
이용하여 플라스틱같은 재료를 받아들여 표현주의보다는 점점 더 구성주의가 강세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카 슐레어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작가를 배출하지 못해서 기능적인 성격의 일면의 약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바우하우스가 일궈낸 디자인론, 미술과 산업 사이의 관계, 형식론 및
교수방법은 각국에 퍼졌다. 바우하우스는 미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쳐 모홀기 나기가 시카고에 디자인 학교를 세웠으며 그 이외 다수의 작가들이
디자인 계통의 작가로서 활동하여 현대까지 영향과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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